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인 칙서 (문단 편집) ==== 영향 ==== 베네치아는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당시 상황이 여러모로 나빠졌어도 유럽은 물론 중근동 전체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부유한 국가가 동로마 제국이었다. 인구도 혼란기였던 11세기 말 최저추산치가 500만, 2차 중흥기(11세기 초중반)의 인구를 회복한 3차 중흥기(1160~70년대)의 인구가 1,200만 이상이고 도시화율도 높아 상업에 매우 유리한 환경이었다. 제국의 수요 수출품인 비단, 유리, 도자기 등은 매우 인기있던 사치품이었으며, 상아와 에나멜 예술품은 근방에서 최고급으로 취급받던 상품이기까지. 게다가 남유럽 일대의 주요 작물인 밀, 올리브, 포도 및 그 가공품들도 제국산을 상등품으로 쳐줬으니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수출입선 모두를 크게 확대할 기회를 잡게 된 것. 다만 이 금인 칙서로 인해 확대된 무역으로 베네치아와 동로마 간의 해상충돌이 불과 수십 년 지난 [[요안니스 2세]]나 [[마누일 1세]]의 시대부터 발생하기 시작하여 무역분쟁이 후대까지 골칫거리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제국 출신 상인들이 기존에 누리던 상세(商稅)상의 우위가 사라져 제국의 쇠퇴를 불러왔다는 평도 있다. 제국이 국력을 완전히 회복했다고 평가 받는 1160~1170년대 들어 [[제노바 공화국]]이나 [[피사 공화국]] 등 다른 해상 도시국가를 끌어들이면서 일종의 경쟁을 유도한 점, 상세를 다시 10%로 되돌리려 제국 정부가 노력한 것을 보면 설득력 자체는 있다. 그러나 11세기 말 기존 제국 경제권은 완전히 붕괴한 상태였었고, 이후 제국 재정 수입중 상당부분을 무역관세로 확보하게 되며, 12세기 후반 베네치아와의 전쟁으로 자금 유입이 끊겼을 때 베네치아의 자본에 의존적이던 그리스 일대의 몇몇 도시들이 불황을 겪었다는 기록을 보면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결과론적인 해석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